元吉(원길) 字聖中(성중) 太初(태초) 號 農隱(농은) 고려(高麗) 말엽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과 함께 오은(五隱)으로 일컬어지셨다. 첫번 시험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셨다. 충목왕(忠穆王) 乙酉(一三四五) 문과(文科) 을과(乙科)에 합격하시어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셨다. 중국 원(元) 나라와 명(明) 나라의 교체(交替) 시기를 당하여서는 원 나라를 배척하고 친명정책(親明政策)을 주장하였으며 학전(學田)을 설치하여 인재(人才)를 양성할 것을 상소(上疏)하셨다. 공민왕(恭愍王) 甲寅(一三七四)에 진봉(進封)되셨다. 그러다가 나라의 형편이 날로 글러지는 것을 보시고 벼슬에 뜻을 잃으셔 우왕(禑王) 戊辰(一三八八) 가족을 이끌고 송경(松京:지금의 開城)에서 순창(淳昌) 금굴리(金掘里)로 물러나시니 이때 포은과 목은이 시(詩)를 지어 송별하였는데, 목은이 선생에게 준 시는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월정집』에 보인다.홍무(洪武) 己巳(一三八九)에 창왕(昌王)을 내치고 공양왕(恭讓王)을 옹립(擁立)할 때 상경(上京)하여 정몽주· 설장수(長壽) 등과 함께 협찬(協贊)하여 1등공신(一等功臣)이 되어 추충분의 익대필성극복 삼중벽상공신(推忠奮義翼戴弼成克復三重壁上功臣)의 호(號)를 받으시고 대광보국 광록대부(大匡輔國光祿大夫)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겸전공판서(兼典工判書)로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封)해지셨으나 숙배(肅拜)하지 않고 귀향하셨다.홍무(洪武) 庚午(一三九0) 八月卒 나라에서 예장(禮葬)을 명하고 충헌(忠獻)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다.정조(正祖) 戊申(一七八八)에 순창군에 있는 무이서원(武夷書院)에 배향되셨는데 좨주(祭酒) 송환기(宋煥箕)가 상량문(上樑文)과 봉안문(奉安文)을 지었다. 그뒤 무이서원은 철훼되고 지난 乙未(一九五五)에 곡성(谷城)의 선비들과 자손들이 새로 무곡사(武曲祠)를 지어 주벽(主壁)으로 모셔 제사를 지냈는데 규모가 협소하고 퇴락하여 최근에 크게 중창(重創)하였다. 墓순창군 유등면(柳等面) 건곡(乾谷) 마을 뒤 자좌(子坐)인데 본래 세운 비석이 있었으나 조선(朝鮮)이 개국된 후 나라에 저촉(抵觸)되는 말이 있어서 묘소 앞에다 묻었다고 전한다. 그후 후손 승지(承旨) 명신(命臣)이 새로 비문을 지어 세운 비가 있고 참판(參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 비명(碑銘)을 짓고 승지 이재윤(李載允)이 글씨를 쓰고 도사(都事) 송병순(宋秉珣)이 전자(篆字)를 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配군부인(郡夫人) 靈光金氏(영광김씨) 父전한(典翰) 김시(金時) 祖문경공(文敬公) 김태용(金台用) 아들 영(瑛)을 낳으셨다.配군부인(郡夫人) 復興趙氏(복흥조씨:복흥은 지금의 황해도 白川임) 아들 유(瑜)를 낳으셨다.配군부인(郡夫人) 扶餘金氏(부여김씨) 아들 근(瑾)· 염(琰)· 숙(?脊?)을 낳으셨다.!2子 元琦(원기) 벼슬은 중문지후 봉익랑(中門祗候奉翊郞)을 지내셨다. 墓장구한 세월을 겪는 동안 병란(兵亂)이 많아 증거할 만한 사적들이 인멸(湮滅)되고 묘소 역시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이 임실군 임실읍(任實邑) 갈마리 선영(先塋) 아래 유좌(酉坐)에 단(壇)을 모으고 제사를 모시고 있다.삼가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족보를 조사하여 보니 오담(吳湛)의 배위(配位)가 순창조씨(淳昌趙氏)인데 아버지는 중문지후(中門祇侯) 원기(元琦), 할아버지는 문하시중(門下侍中) 여(璵)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 싣는다.